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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진리로 모두 편안하기를

기사승인 2018.12.19  16: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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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허정스님의 부처님을 따라 거닐며_19

웨살리(바이샬리)는 남북으로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여서 상업도 발달하였다. 상업의 발달로 화폐가 빈번하게 통용되다보니 불멸후 100년이 지나서는 스님들도 화폐를 받는 일이 생겨 제2차결집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부처님이 웨살리를 방문한 것은 깨달음을 얻은후 5년째가 되는 해였다. 웨살리에 가뭄,질병,악귀가 출몰하자 마할리는 빔비사라왕에게 부처님을 초청하고자하는 뜻을 전달한다. 웨살리의 마할리와 말라의 반둘라왕자 그리고 빔비사라왕은 딱실라(Takkasilā)에 같이 유학한 도반이었기에 가까운 사이였다.

빔비사라왕의 도움으로 부처님은 웨살리를 방문했고 보배경을 설하여 가뭄,질병,악귀를 쫒아냈다. 부처님의 위력을 체험한 웨살리 릿차위 사람들은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까지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가 되어 꾸시나가라로 향할 때 웨살리 사람들이 50km가 넘는 거리를 따라오면서 부처님을 배웅한 것 만을 봐도 부처님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지칠줄 모르고 따라오는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여러차례 말했지만 계속 따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자 당신의 발우를 건네 주는 것으로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릿차위 사람들은 그 발우를 왕궁으로 가져가지 않고 부처님과 헤어진 바로 그 자리에 발우를 모신 케사리야 탑을 세웠다. 웨살리와 꾸시나가라 사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탑은 릿차위들의 슬픔의 크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케사리야 탑

웨살리 사람들이 보배경을 외움으로서 나라의 안정과 평화가 찾아왔듯이 그 이후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고난을 겪으면 부처님이 설하신 경을 읽어 액난을 물리치려는 전통이 생겨났다. 스리랑카에서도 기근과 질병이 들었을 때 보배경을 밤새워 독경함으로서 기근과 질병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보배경은 축복경, 자비경과 함께 대중적으로 알려진 보호주가 되어 우리나라의 반야심경처럼 법회나 행사시에 자주 독송된다. 그렇다면 웨살리의 모든 액난을 물리친 보배경은 그 자체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까? 보배경은 세가지 보배를 이야기한다. 그 보배는 부처님, 가르침, 상가이다. 간단히 말하면 보배경은 삼보에 귀의한다는 내용인데 삼보에 귀의하는 공덕이 그 만큼 크고 탁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불법승은 보배이므로 귀의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어떠한 분이시고, 가르침은 어떠한 것이고, 귀의대상이 되는 성스런 승가는 어떤 단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진리로 평안하게 되어지이다’라는 축원이 반복되고 있다. 내가 보배경에서 인상깊게 느낀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에서 웨살리로 올때 건너신 갠지스강

세존은 나의 가르침을 믿으라고 말하는 분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시는 분이다. 부처님은 달의 비유경(S16:3)에서 '“참으로 사람들은 세존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가르침을 듣고 나서 그것을 믿어야 한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면 이것은 청정하지 못한 법을 설하는 것이고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나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고 나서 이해한 대로 실천해야 한다.”라고 설명 한다면 이것은 청정하게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진실로 이 세상에서는 부처님, 가르침, 상가만한 의지처가 없고 보배가 없기에 이 세가지에 귀의하고 보시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많은 공덕이 있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고 못하고의 문제다. 여기에는 억지 믿음이나 논리의 비약이나 과장이 없다. 진리가 그대를 구원하리라. 진리가 그대를 편안케 하리라는 메시지만 있다. 그래서 ‘이러한 진리로 인해서 모두 편안히 지내길 바랍니다.(Etena saccena suvatthi hotu!)’ 라고 말할 뿐이다.

대승불교권에서 조석으로 외우는 천수경이나 칠정례도 간단하게 말한다면 삼보에 대한 귀의가 그 내용이다. 그러나 대승의 칠정례와 천수경은 삼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어찌보면 상주하는 삼보를 믿어라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러한 태도는 이해(깨달음)의 종교를 믿음으로 가두게 된다.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보배경에는 부처님은 지멸(止滅)과 소멸(消滅)과 불사(不死)와 승묘(勝妙)를 얻은 분이기에 보배이며, 가르침은 4성제로서 보배이며, 상가는 사쌍팔배(四雙八輩)로서 보배이다. 특히 보배경의 17게송 중에 상가에 대한 내용은 8번이나 등장하고 그중에서 성인의 첫단계인 수다원과의 내용을 설명하는 게송이 5개나 된다. 예류과를 얻는 즉시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 가르침에 대한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이라는 3가지 족쇄가 사라지고 아무리 게을러도 지옥, 축생, 아귀계, 아수라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으며 최대한 여덟 번째 윤회를 받지 않는다.

이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큰 복을 가져오며 어머니와 아버지와 아라한을 살해하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고,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고 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6가지 큰 죄를 저지를 수 없고 신체와 언어와 마음으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감출 수 없다고 설명한다. 승보가 되는 첫단계인 예류과의 특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손톱경’에서 손톱위에 흙을 올려 놓으며 “비구들이여! 이 큰 대지와 나의 손톱 끝에 올려진 흙과 어느 쪽이 더 많은가?”라고 물으셨다. 손톱위에 흙의 양이 말할 수 없이 적듯이 수다원과를 얻은 자는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설명하신다.(S13:1)

웨살리에 릿차위들이 세운 부처님 사리탑

이처럼 보배경은 구체적으로 예류과와 아라한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서 보배경을 독송하는 불자들은 자연스럽게 승보를 잘 이해하고 승보에 귀의하고 공양한다. 이러한 수다원과에 대한 이해는 견도(見道)의 단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알아서 적어도 믿고 따를 수 있는 선지식은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하는지, 스스로 수행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된다. 반면 칠정례에는 상주일체승가(常住一切僧伽)를 강조하지 승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무엇이 승보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어떻게 승보에 귀의하며 어떻게 자타일시에 성불하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아직도 삼귀의를 한글화하면서 승가와 승보를 경장(4쌍8배의 성인)과 율장(최소 4인이상의 비구(니))에 맞게 번역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글 삼귀의에서‘스님들’은 문법적으로 복수인 비구(bhikkhū )비구니(hikkhunī )의 번역이지 승가(saṅgha)의 번역은 못된다. 오늘날 불자들이 '성(聖)승가'가 아니라 '범부승가'에 귀의하더라도 법정스님께서  제안하셨던 바와같이 ‘ 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로 수정하는 것이 한국불교가 청정해지고 이 땅에 불법이 오래 가도록하는 길이라고 본다.

이번 성지순례기간동안 우리는 델리에 머물 때를 제외하고 (한국,미얀마, 태국, 베트남등)사찰에서만 머물렀다. 나라와 인종이 달라도 우리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제자라는 ‘사방승가(四方僧伽)’ 정신에 의해서 당당하게 찾아갔고 그들은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처음보는 한국의 스님들을 도반, 불자(佛子)로 인식하고 따듯하게 맞이하여 무료로 재워주고 먹여주는 그들을 보며 새삼스럽게 ‘승가’의 의미를 확인하였다. (우리는 저렴한 숙소에서 숙박하는 기준으로 사찰에 보시를 하였다)부처님 시대부터 전 세계의 모든 사찰이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특정한 스님에게 보시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승가에게 보시되고 승가를 위해서 건립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허/정/스/님/의/부/처/님/을/따/라/거/닐/며
불교포커스 여시아사(如是我思)

벌써 4번째 인도성지순례다. 인도의 기후와 도로 사정 등은 순례자에게 만만치 않지만 성지순례를 시작하는 가슴은 늘 설렌다. 스승의 발걸음을 쫓는 일은 매번 새로운 발견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첫 순례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다녔기에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

두 번째는 그래도 책을 들고 꼼꼼히 찾아 다녔다. 정보가 많지 않아 크게 느낀 것은 없고 다만 부처님의 열반지에 가서 우울증 같은 걸 겪었다. 세 번째는 나를 포함한 스님들 여섯 명과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성지순례를 했는데 그 때가 가장 의미 있었다. 그런데 그 순례도 중간에 순례자 한명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미완의 순례가 되고 말았다.

이 번에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홀로 떠났다. 성지순례후기까지 쓸 작정을 하고 와서 그런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성지를 알게 되었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성지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느꼈던 소감을 공유하고자 한다.

허정스님_ 전 천장사 주지 budgat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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