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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1] 한국불교의 현실과 사회적 신뢰 구축

기사승인 2018.11.06  00: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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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1. 여는 글

현실은 늘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오곤 한다. 그것은 때로 느낌으로 다가오고, 그 느낌마저 지속적으로 변화하면서 고정된 형태를 지니는 것을 방해한다. 느낌에 주목해보면 현실은 일차적으로 몸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 몸을 통해 현실을 느끼고 그 느낌에 대해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몸이 마음 또는 정신과 온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은 내 마음 또는 정신에 근거한 인식과 반응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불교의 현실’이라는 우리의 주제는 그 현실 중에서도 한국불교와 관련된 것이라는 특수성을 지닌다. 그것은 ‘한국불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한국불교 자체가 느끼거나 반응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이때 문제는 그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크게 보면 주체는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한국불교를 온전한 인식과 비판의 대상으로만 설정하고자 하는 외부의 주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외부의 시선을 감당해내면서 자신까지 인식과 비판의 대상으로 내놓아야 하는 내부의 주체이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는 대체로 후자일 가능성이 높고, 발표자 또한 마찬가지다.

발표자는 재가보살과 출가보살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사부대중공동체의 구성원 중에서 재가자이다. 동시에 불교윤리를 주된 전공으로 내세우면서 한국의 종교와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체성 규정은 연구대상에 통계적 진리를 통해 접근하지 않고 그 대상과의 거리 유지를 바탕으로 참여와 관찰, 이해와 내러티브를 시도하는 질적 접근을 택하고자 하는 연구자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연구자 자신의 편견으로서의 아비투스와 제한된 연구방법 등이 지닐 수밖에 없는 자기인식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청인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한계에 관한 인식은 연구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주면서 동시에 그 한계 안에서의 명료성 내지 지향성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물론 일정한 한계 안에서의 명료성이고 지향성이라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대상 인식을 위한 일정한 거리두기와 실천을 위한 뛰어듦의 변증법이 함께 전제될 수 있을 때라야 내부자의 시선은 보다 적실성을 지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들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들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일치하는 것은 상당한 정도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인식이다. 그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해결 방안이 무엇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문제가 없다고 진단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아래 그런 의견 중 일부를 놓고 함께 검토해보기로 하자.

“최근 몇 달 동안에 한국불교에서 발생한 일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짧은 기간에 한국불교 최대교단의 현실과 문제점들이 거의 모든 불교인에게 인지되었고, 사회적 수준에서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교단 운영의 근본문제가 이처럼 단기간에 불교계와 사회의 공적(公的) 의제로 뜨겁게 부각된 적이 있었던가? ...... 질적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한 현실적 출발점은 간단하고 명백하다. 부처님 가르침에 상응하는 제도를 갖추는 것이다.”(박태원, 「근현대 한국불교의 기적, 그 이후」 , 『불교포커스』 2018.10.19.)

“대다수 분야에서 한국불교는 중세 봉건체제의 잔재인 기복성, 가부장적 질서, 농경사회에 부합하는 교육과 수행 시스템을 유지한 채 자본주의적 탐욕과 소비, 향락으로 병들고 있는데, 근대적 합리성을 달성하고 시민사회로서 공론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재주술화의 파도에 휘청이고 있다.”(이도흠, 「포스트세속화/탈종교화 시대에서 한국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 ‘불교개혁행동’ 불교개혁 워크샾 발제문, 2018.10.6.)

이 두 의견이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라보는 의견들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최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관점들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박태원의 경우는 교단운영의 근본문제가 적나라하게 세상에 노출되었고 이제는 질적 수준의 확보를 통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고, 이도흠의 경우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불교계에도 근대적 합리성을 전제로 시민사회로서의 공론장이 정착할 수 있어야만 문제의 근본적인 해소가 가능하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견해에 공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은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이 심각하다는 인식이고, 박태원의 경우에는 그 문제점들이 공중파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 국민에게 알려지게 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박태원의 주장은 최근의 조계종 적폐에 관련된 집중적인 언론보도가 한국불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의 심각한 하락을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제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인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도 사실상 한국불교는 그동안 현실과 동떨어진 채 단박의 깨침만을 지향하는 산중불교요, 다른 한편으로는 다분히 개인의 복을 기원하는 기복불교로서 개인적 신앙의 차원으로 떨어져 한국사회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형성해가는 능동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이찬훈, 2016) 이찬훈(2016), 「불교의 깨달음과 그 구현-최근 한국불교계의 깨달음 논쟁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불교문화』 27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311쪽.

이찬훈의 주장은 2015년 이후 몇 번에 걸쳐 전개되었던 ‘깨달음 논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한국불교가 대승불교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산중불교이자 기복불교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깨달음 논쟁이) 그간 틀에 박힌 전통적인 수행법에만 매달리면서 절실한 중생의 삶과 고통의 해결이라는 현실로부터 멀어져버린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과 그 방도의 재정립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라는 의견을 덧붙이고 있다. 이찬훈, 위의 글, 285쪽.
 
이미 조계종 승려들의 상당수가 위빠사나와 같은 초기불교의 수행법에 노출되어 있고, 그 중 일부는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자신의 수행을 실천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과연 조계중 중심의 한국불교가 간화선 수행에만 몰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간화선 수행을 중심에 두고 운영되는 선원(禪院) 또한 일정한 위기를 노정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내부로부터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조계종 선원에서 수행되어지는 참선수행은 전적으로 간화(看話) 방법론에 입각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간화선의 위기를 제기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현재 간화선 수행의 문제는 여러 선장(禪匠)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간화선 수행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많은 부분 ‘간화선을 수행하는 수행자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간화의 물음이 삶 전체의 문제를 풀어내는 보편적인 방법론으로 서지 못하고, 적정무사에 안주하여 선미를 탐미하는 일부 수행자의 도피적 방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말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범허, 「조계종의 현실 진단과 개선방향」 , 『신대승 이메거진 11호, 2017.4.)

2017년 4월 기준 전국선원수좌회 학술분과위원장 자격으로 발표한 범허스님의 이러한 현실 진단은 간화선 수행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선원 구성원의 자기성찰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찬훈의 간화선 중심의 깨달음 지상주의에 비판과 함께, ‘한국불교의 마지막 보루’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선원의 실참에 관한 자기성찰은 한국불교의 위기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측면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고, 때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열려 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의 보장은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학문이 지니게 되는 ‘다원보편주의’, 즉 단 하나의 보편성이 아닌 맥락의존적인 보편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고려해볼 때 바람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원보편주의’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김현구(2018), 「한국 사회과학 이론의 보편주의: 서구보편주의를 넘어 다원보편주의로」, 『한국정치학회보』 51권 1호(한국정치학회, 201-228쪽)을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다원보편주의 또한 보편성에의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라보는 과정에서도 최소한의 보편성이 확보될 수 있어야 하고, 그 보편성은 맥락의존성과 함께 진리지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을 때라야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

3. ‘한국불교의 현실’이 지니는 역사성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으면서 느끼거나 분석해야 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화두다. 우리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주체이면서도 분석은 물론 해결방안 모색 과정에서도 쉽게 그 출구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몸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느끼거나 분석하면서 이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일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불교의 현실은 기본적으로 역사성을 지니고 있고, 그 역사성은 다시 자신이 짓는 업이라는 실천성을 매개로 삼아 과거에서 현재, 미래라는 찰나의 연속성으로 구체화된다.

21세기 초반을 시간적 기준으로 삼아 우리 불교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역사성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1.700여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현재와 같은 현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지만, 특히 20세기의 역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20세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에게 20세기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굴욕과 저항으로 다가왔다. 을사늑약과 의병운동, 강제합방과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으로 이어진 20세기 초반부는 양반 지배층의 도덕성과 정치적 역량에 기대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하는 위민(爲民)이라는 조선의 이상이 지니는 시대적 한계와 도전 속에서 맞은 것이기도 했다. (이 절 이하의 내용은 정의평화불교연대가 주최한 3회 정평포럼(2018.8.13. 서울시민청)에서 발표한 「한국불교의 미래와 계율정신」의 일부를 가져온 것임을 밝혀둔다.)
 
우리 불교는 그 상황 속에서 이중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주의자들의 억압과 지배라는 일반적인 도전이고, 다른 하나는 천민으로 전락했던 승려 신분의 회복과 물질적 기반 구축 기회라는 특수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도전 속에서 당시 승려들은 대체로 후자의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상당한 지위와 권력, 자본까지 획득하는 길을 걷는다. 이른바 친일불교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도전 속에서 전자에 주목하면서 나라의 독립과 불교의 종교성을 회복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루어내고자 하는 귀한 시도들이 있었다. 3.1운동 민족지도자로 참여한 만해와 용성이 그 시도들을 상징한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종단의 중심과 주변에서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면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켜내고자 노력했고, 일정한 성공과 좌절을 동시에 맛보아야 했다. 이 주제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졸고(2018), 「3.1운동 전후 한국불교계의 현실인식과 우리 불교의 미래」,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 연속 세미나 발표문(2018.9.20. 서울 프란치스코회관)을 참조할 수 있다. 가톨릭, 개신교, 유교, 천도교와도 함께 하는 이 연속세미나 결과는 2019년 3월 1일 백주년을 전후한 새로운 독립선언서 발표와 발표논문의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질 계획이다.
 
성공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3.1운동과 독립 운동 자체이고, 좌절로는 급속한 왜색불교화와 계율의 쇠퇴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성공과 좌절은 광복 이후 우리 불교의 상황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업으로 작동했고, 그에 따른 보(報)는 21세기 초반인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왜색불교는 대처승단의 주도권 확보와 노골적인 친일로 이어졌고, 광복 이후의 상황 속에서는 대통령 유시에 기반한 타율적인 ‘정화’의 굴곡으로 이어졌다. 1962년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은 외형적으로 왜색불교의 잔재인 대처승단을 비판하면서 ‘청정 비구, 비구니 승단’이자 ‘우바새, 우바이’가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사부대중공동체의 지향을 내세웠지만, 승단의 핵심 기반인 계율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함으로써 지속적인 위기 상황을 노정시켜야만 했다.

조계종단 핵심 지도층의 은처자 의혹은 그 중에서도 기본적인 오계(五戒) 중 하나인 불사음계(不邪淫戒)를 위반하는 것이어서 종단 자체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불행히도 이 충격이 누적되면서 승단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무감각과 면역 현상마저 만연해 있다. 최근의 총무원장 스님들이 많은 경우 은처자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런 현상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우리에게 20세기 초반 식민지 경험은 전통 신분제 사회의 자율적인 극복의 과정 상실과 힘 있는 자에게 적극적으로 빌붙음으로써 생존은 물론 상당한 정도의 지위와 권력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식민지 ‘마름의 현실인식’을 사회정의로 포장하게 만드는, 소피스트적 파국의 결과를 낳았다. 다시 말해서 지주에게 붙어 소작인을 착취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자신의 생존 기반과 알량한 권력을 보장받고자 했던 부정적인 의미의 마름의식이 전 국민에게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 마름의식은 미 군정기를 거치면서 숭배의 대상을 미국으로 바꾸는 친미적 성향의 고착화로 이어졌고, 현재까지도 특히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이른바 ‘기지촌 지식인’의 이중적 삶을 일상화하게 하는 불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현상은 불교계 안에서도 당연히 재생되고 있다. 재가보살과 출가보살 모두의 깨달음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처한 상황에 따른 차별화 가능성 또한 수용하는 대승불교의 정신은 현재 조계종 종헌에도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조계종단은 조선시대 500년의 불교 탄압에도 꺾이지 않고 실낱같이 불조의 혜명을 이어오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와 이사무애(理事無礙)를 드높이며, 대승불교의 부처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을 실천하여 온 것이다.”(조계종 종헌 전문 중에서)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 『계율과 불교윤리』, 조계종출판사, 2011, 250쪽.

“이와 같이 보살이 배워야 할 세 가지 계장에 대해 부지런히 닦아 배우려 하는 이는, 재가자이거나 출가자이거나 간에 먼저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보리의 큰 서원을 세운 뒤에 법을 같이 하는 보살로서, 이미 큰 서원을 세워 지혜도 있고 힘도 있고 말로 표현하는 뜻도 있어 깨칠 수 있는 이를 찾아 구해야 한다.”(『유가론』 「보살지」) 여기서는 원영 편저, 『대승계의 세계』, 조계종출판사, 2012, 291쪽에서 재인용

보살계의 기반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공존과 자율성이다. 다만 수행의 과정에서 처할 수 있는 상황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보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보살이요 둘째는 출가보살이다. 재가자에게는 여섯 가지 무거운 법이 있고 출가자에게는 여덟 가지 무거운 법이 있다. 이 법들 가운데 보살이 어느 하나 또는 모두를 범하면, 현재에 한량없는 무상보리를 장엄할 수 없고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없다. 이는 이름만 보살이지 진정한 보살이 아니다. 당연히 사문이라 부를 수 없고 바라문도 아니어서 최상의 지혜에 바르게 나아갈 수 없다.”(『보살선계경』 「우바라문보살수계법」) 위의 책, 370쪽에서 재인용.

두 보살 사이의 차이는 계율의 양적인 차이이지 질적인 차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색불교의 그림자는 그러한 양적인 차이를 질적인 차이로 상정하게 하여 승가에 대한 재가의 수직적인 복종과 타율성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 스님, 우리 스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어떤 추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재가보살의 굴종적인 신앙이 그 어두운 그림자의 일단이다. 『유가론』에서 말하는 ‘큰 서원을 세워 지혜도 있고 힘도 있고 말로 표현하는 뜻도 있어 깨칠 수 있는 이’는 당연히 출가보살로 한정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인정하고 또 존중해야 하는 것은 더 많은 수의 중계(重戒)를 기꺼이 수지하면서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에서 수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출가보살과 승가공동체일 뿐이다. 20세기 초반 한국불교에 정착한 왜색불교의 짙은 그림자는 바로 그 계율정신의 마비와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곧 한국불교 자체의 왜곡이자 타락이며 소멸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한국불교의 현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역사성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학계에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본불교학의 수입으로 출발한 한국 불교학계는 문헌학적 정밀성이라는 긍정적 요소와 함께,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불교학을 학문적 지표로 삼아 전개되는 타율성을 문제점으로 노출시키고 있다. 불교문헌의 성립 과정에 관한 탐구가 불교학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불교학의 외연을 제한하는 장치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쟁점들에 대해 불교가 제대로 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응용불교학의 적극적인 도입과 함께, 우리말로 번역된 경전에 대한 학문적 신뢰, 국내 불교학자의 논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의 제고 같은 분위기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이처럼 한국불교의 현실 속에 내재된 역사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재의 한국불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따라서 이러한 영향력에 대한 정당한 인식은 현재의 우리 불교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기대는 다시 20세기 이전 조선과 고려, 삼국시대의 불교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불교사에 대한 정당한 인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 때 더 커질 수 있지만, 이 과제는 다른 논의의 장으로 미루고자 한다.

4. ‘한국불교 현실’의 현재성과 신뢰 문제

한국불교의 현실은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라는 배경 속에 존재한다. 배경이 되는 이 사회 역시 우리 자신이 주체이기 때문에 인식과 실천 영역 모두에서 난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경험하고 있는 이 사회가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들을 꼽아볼 수 있고, 이런 작업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인식의 장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을 마련할 수도 있다. 우리는 20세기에 정치와 경제 영역 모두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는 ‘압축성장의 신화’를 썼고, 그 성장의 과실과 함께 심한 후유증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2018년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우리 한국사회는 양적 성장의 결실인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형식적인 수준의 민주주의, 심화되는 빈부격차와 물신주의(物神主義) 심화, 여전한 평화 위협 등의 징후를 노정시키면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해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북한과의 평화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다시 북미간의 평화체제 정착 논의로 진행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과 물신주의를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정신적 영역의 대안과 시민윤리의 정착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강화이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주로 종교에 기대하고, 후자는 학교 중심의 교육에 기대한다.

가. 신뢰도 하락과 계율 문제
그런데 한국불교를 비롯한 종교(계)가 이런 기대에 얼마나 부응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답변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현대리서치연구소에 의뢰해서 만 19세 이상 일반 국민 1.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5년 신뢰도 조사에서, 종교계에 대한 신뢰도는 의료계와 시민사회단체, 금융기관, 학계, 대기업에 이은 6위에 불과했다.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2015), 『한국의 사회·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40쪽 참조.

종교계 내에서 불교에 대한 신뢰도는 천주교(39.8%)에 이어 2위(32.8)로 나타났지만, 2018년 조계종단의 비리와 추문에 관한 일반 국민들의 인지와 관심을 고려해볼 때 당연히 더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개신교의 경우가 이때는 가장 신뢰도가 낮아서 10.2%에 불과했다. 위와 같은 보고서 66쪽 참조.

2015년을 기준으로 나온 통계 중에서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10년 전인 2005년에 비해 불교인구수가 약 300만 감소했다는 통계청의 발표였다. 이 통계조사결과를 다룬 ‘아시아경제’의 ‘탈종교와 되는 한국, 30년만에 종교인 인구 최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불교인구가 1.000명 선이 붕괴되어 761만명에 그치고 있다.’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탈종교화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탈종교화가 천주교와 불교의 인구수가 감소된 현상을 설명하는 한 방식일 수 있다.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126/ 2018.10.24. 검색.

10년 전에 비해 10% 이상 줄어든 종교인구 전체 숫자를 고려해보면 전반적인 탈종교화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분석할 수도 있지만, 불교의 경우 그 감소폭이 충격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요인 분석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요인들 중에서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상징되는 한국불교계의 범계 일상화로 인한 신뢰도의 급속한 하락과, 21세기 초반 한국에서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종교적 요구에 대한 적절한 대응의 미흡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대한불교조계종을 대표하는 승려들의 범계행위는 당연히 불교계 내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비판 대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수행자로서의 승려를 기대하고 그 수행자의 위상은 계율의 준수와 수행, 자비행 등을 기반으로 확보될 수 있다. 그런데 이른바 사판승으로 고립된 듯한 느낌을 주던 많은 지도자급 승려들이 일반시민이 지니고 있을 것으로 기대받는 최소한의 도덕성조차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표되면서 승가권위의 훼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권위의 훼손은 불법승 삼보에의 귀의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불교의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일부 개혁적인 재가자들을 중심으로 ‘스님에게 귀의합니다.’라는 승보(僧寶)에의 귀의를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승가의 계율은 ‘사분율(四分律)’의 비구·비구니계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보살계를 수지하는 중층적 구조로 되어 있다. 초기불교 승가공동체의 계율과 선원(禪院) 중심의 대승계를 동시에 수지하는 전통은 한국불교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너무 많은 계율 또는 현재의 상황에 부적절할 수도 있는 계율의 문제를 야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계율 경시 풍조를 가져오는 한 가지 배경 요인이 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에 의한 계율 제정이 수범수제(隨犯隨制)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감안하여, 제자 가섭이 주도했던 소소계 논쟁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계율을 고르거나 새로 제정하고 다른 계율들은 율장의 역사 속에 포함시키는 방식의 새로운 계율 확립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노력은 승가 외부의 계율에 대한 금기풍조가 남아있는 우리 불교계 안에서 율사스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노력을 바탕으로 삼아 범계행위에 대한 일관되면서도 단호한 징계가 보장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불교계에 대한 신뢰 회복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재가자들의 계율은 어떨까? 보살불교의 전통 속에서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결정적인 차이는 출가(出家)이고, 그 출가는 수행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과 배경의 차이를 불러온다. (한국 시민사회에서 승가공동체와 그 구성원인 출가보살이 어떤 위상과 역할을 지닐 수 있을지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졸고(2016), 「한국 시민사회에서 승가공동체의 위상과 출가보살의 역할」, 『동아시아불교문화』 26집, 245-248쪽을 참조할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 초반 한국의 상황은 인터넷 기반의 다양한 가상적 관계망이 확충됨으로써, 재가와 출가의 경계가 상당 부분 완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바새계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나쁜 인연에 얽매일 수 있는 가능성’에서 재가보살 또한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과 깨달음, 열반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가능성은 보살계를 마음으로 수지하고 몸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엄중한 전제 속에서만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최소한 재가 5계를 수지하고 늘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때라야 보살로서의 위상 또한 확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복불교와 이름뿐인 불자 사이를 오가는 한국불교의 재가자들 또한 성찰과 실천의 길에 나설 때에 비로소 한국불교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 수 있다.

나.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과 대응 문제
2018년을 기준으로 한국사회의 제도종교에 대한 신뢰와 열망은 지속적으로 그 강도가 약해지고 있다는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통계 자료들이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개신교와 불교의 상황이 더 심각하다. 개신교의 경우 10년 전에 비해 신도수가 늘었다고 하지만, 그 늘어난 부분이 이른바 ‘사이비’로 분류되는 광신적 행태의 신도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은 편이지만. 최근 천구교 각 교구에서 운영하는 사업체의 비윤리적인 경영과 신부의 도덕적 일탈 등으로 인해 상당한 정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제도종교에 대한 불신은 절과 교회, 성당으로부터 떠나가는 신자들의 증가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제도종교에 대한 비판과 비난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특히 전체 인구수의 절반을 넘어선 무종교인들의 냉소적 시각과 비난은 실제적인 충돌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배타적인 인식으로 인한 타 종교인에 대한 폭력적 배제도 포함하는 문제다. 종교 간의 대화와 서로의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실천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고, 특히 이슬람이 제도종교의 한 축으로 도입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여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이해와 무슬림의 역사와 삶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의 정도를 높여가야 하는 과제가 더해지고 있다. 올해부터 고등학교 현장에서 채택되고 있는 ‘고전과 윤리’라는 과목에는 전체 15권의 인류 고전 중에 ‘꾸란’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종교 고전으로는 ‘신약성서’와 ‘금강경’이 포함되어 있고 한국불교 고전으로 ‘수심결’이 추가되어 있다.
 
21세기에 인류가 답해야만 하는 큰 문제를 기술적인 문제와 정책적인 문제, 정체성의 문제로 구분하는 유발 하라리는 특히 세 번째 정체성의 문제에서 여전히 종교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양한 종교적 전통들은 세상을 수많은 추함으로 채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잔인하고 비열하게 만들기도 한다. ..... 하지만 아름답든 추하든, 모든 종교적 전통은 특정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이웃을 구분한다.” 유발 하라리, 전병근 옮김(2018),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김영사, 207쪽.

제도종교의 현실적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하라리에게서 제도종교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그다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종교적 정체성과 구분, 배제를 통해 문제를 야기시키는 요인 자체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불행히도 전통종교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치유책이 아니라 그 일부’라는 것이다. 위의 책, 211쪽.

종교적 정체성에 기반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그것이 다시 석유자원 확보와 같은 경제적인 요인과 얽혀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비판이다. 물론 이런 비판의 수용 과정에서는 달라이 라마나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종교지도자의 평화를 위한 노력에 대한 공정한 시선이 포함되어야겠지만, 전반적으로 제도종교의 현실적 영향력이 지니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경고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본능적 자각을 토대로 하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존재자이기도 하다. 인간 생명의 성립 요건 세 가지 중 하나로 수명(壽命)을 강조하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아도, 인간은 연기법칙에 근거하여 수명만큼 살다가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자이다. 이런 유한성은 윤회(輪迴)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와 선행이나 수행을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하고, 때로 절대적 존재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전제하는 타력신앙의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런 열망들에 근거해서 정착한 제도종교에 대한 실망이 커질 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대안은 무종교인이 되거나 자신의 내면세계 속에서만 종교성과 만나는 사사화(私事化)된 종교인이 되는 것이다.

사사화된 종교인은 또 다른 의미의 종교인이라는 점에서 예외로 하고, 무종교인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문제와 관련된 하라리의 분석에서도 나타나 있는 것처럼, 세속주의자들은 그들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서 세상과 마주하고자 한다.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진실의 추구와 자신과 같은 동료인간과 반려동물에 대한 연민이 핵심가치라고 보는 하라리는 결국 그것이 평등과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가치와도 만나게 된다고 강조한다. 유발 하라리, 전병근 옮김(2018), 앞의 책, 307-314쪽 참조.
 
근대 이후 시민사회가 종교를 전제로 하지 않는 공리주의 윤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하라리의 분석은 일정 부분 적실성을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약점, 즉 무명(無明)에 근거한 게으름과 잔인함은 이러한 세속주의의 가치들을 지속적으로 망각하게 만들고, 그것이 다시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과 겹치면서 물신(物神)의 호출을 불러올 수 있다.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쟁을 질서로 상정하는 시장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을 급속도로 축소시키면서 또 다른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는 하비 콕스의 비판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비 콕스, 유강은 옮김(2018), 『신이 된 시장』, 문예출판사 1장 ‘신이 된 시장’ 참조.
 
문제는 이런 현실이 지속불가능하다는 데서 생긴다. 미세먼지와 기후변화로 상징되는 환경 파괴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핵전쟁 가능성의 엄존 같은 외부적 요인과 함께, 삶의 의미 물음에 대한 지속적인 외면의 불가능성과 존재 자체의 공성(空性)으로 인한 마음의 평화 결여 같은 내적인 요인들이 겹치면서 인간의 ‘종교적인 것’에 대한 욕구와 열망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욕구와 열망에 적극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함으로써 불교를 비롯한 제도종교에 대한 신뢰도 또한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5. 맺음말 : 우리불교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이 엄중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최대교단의 상황은 총무원장과 같은 상층부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과 물신주의에의 습윤(濕潤), 승가 내 개인주의 만연과 출가자 감소 등으로 인한 승가공동체 자체의 해제 위기, 재가보살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 계율정신의 상실 등으로 인한 사부대중공동체의 미형성 등과 같은 위기 징후가 지속되는 현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불교는 20세기 우리 사회가 보여준 극적인 민주화 과정에서의 저항과도 맞물려 있는 재가보살에 의한 개혁요구의 분출과, 이에 대한 일반 시민사회의 관심이 만나면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불교가 처한 위기는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다. 다만 이 기회가 현실로 구현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위기에 관한 객관적이고 정당한 인식과 그것에 기반한 실천이 따라와야만 할 것이다.

현재 우리불교는 전통에 기반한 제도종교로서의 외형적 차원을 확보하는 데서는 성공한 듯 보이지만, 그마저도 20세기 역사 속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로의 적극적인 편입 노력과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권위주의 정권에의 예속을 통한 이권 확보 등을 추구한 쪽이 주도권을 확보했고, 정화(淨化)마저도 다른 종교를 가진 정치인의 교시와 폭력에 의존해 성공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부도덕한 승가지도층 형성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유산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급속한 개인화와 물질화로 인한 삶의 의미 와 방향 상실, 우울증 같은 정신적 증상들에 대응할 수 있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서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제도권과 비제도권 모두에서 시도되고 있는 명상문화의 정착노력 같은 것이 상업화 우려라는 부정적인 인식 속에서도 일정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은 쉽게 극복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로는 우선 문제의 근원 중 하나인 조계종단 지도부의 안일한 현실 인식이 여전하다는 점과,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음에도 그 대안 마련 과정의 적실성 문제와 함께 실천성이 확보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불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우리 자신의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 생각보다 그 답은 가까운 데 있다.

우선 우리불교계가 한국 시민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점검하면서,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시민성과 시민윤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보살불교에 기반한 21세기 사부대중공동체는 당연히 깨달음과 열반의 지향이라는 목표와 함께, 모든 구성원의 도반(道伴)으로서의 관계설정을 전제할 수 있어야 한다. 비구니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보살에 대한 극심한 차별을 시급히 극복하고 동등한 보살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출가’를 중심으로 하는 출가보살의 고유성과 독특성에 대한 존중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사부대중공동체로 가는 지름길이자 대 사회적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다.

이러한 사부대중공동체 구성원들의 시민성은 시민윤리의 확보로 이어져야 하고, 이 시민윤리는 기본적으로 오계(五戒)의 현재적 재구성과 실천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 공장식 살처분으로 지탱되는 과장된 육식문화에 비판적 시선을 보내면서 자신의 상황에 맞게 실천하는 일이나, 생명과 평화를 확장시킬 수 있는 일에 일정하게 마음과 시간을 보태는 것과 같은 실천행으로서의 보살행을 우선으로 하면서 수행과 수행문화의 정착에 힘을 쏟는 대안이 모색될 수 있다. 그것과 함께 자신의 일상 속에서 최소한의 도덕성이 살아 있을 수 있게 하는 노력이 병행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불교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가능해질 것이다.

두 번째로는 좀 더 적극적인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각자의 삶에서 계율정신에 기반한 도덕성과 시민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연기적으로 얽혀있는 존재자들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그들이 삶의 의미 물음에 관심을 갖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방안이다. 그 과정에서 경쟁으로 인한 불안과 공허, 불필요한 배타심의 일상적인 표출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잠시 멈추고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 공간이나 그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칠 필요가 있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우리불교에 대한 인식에서 신뢰도가 적극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계기 또한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 있겠지만, 동시에 상업화되면서 표피적인 힐링 문화에 흡수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현재의 불교 명상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은 신뢰회복 방안, 즉 불교공동체 안에서의 시민성과 시민윤리 확보와 보다 적극적인 삶의 의미 제공 같은 대안들은 당연히 내·외부가 분리되지 않는 불이적(不二的) 관계 속에 있다. 우리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현재의 위기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요구되지만, 그 비판의 과정에서 나와 외부의 분리가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적 요청 또한 부처의 가르침에 근거한 지혜의 핵심에 근거한 것이다.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인식에 근거한 자비로운 분노와 실천은 불교적 의미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할 수 있는 지름길이자, 우리 불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대안이기도 하다.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budgat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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