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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타르타의 출가행로는 어떠했나?

기사승인 2018.03.14  15: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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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허정스님의 부처님을 따라 거닐며_03

싯타르타 왕자가 29세까지 살았던 까삘라왓투 왕궁터에서 그의 출가를 생각한다. 그는 동쪽 문을 향하여 떠났다. 라훌라가 태어난 지 일주일 뒤라고 전한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애로다!(Rahula!)”라고 탄식했다. 출가를 마음에 둔 사람에게 핏줄이 더 늘어났다는 것은 애착의 대상이 더 늘었다는 것이므로 ‘장애’라는 탄식이 나올만하다.

그런데 싯타르타는 아들이 태어났으므로 출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제 가문을 이을 아들이 태어났으니 출가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을까? 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출가한 것으로 봐서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싯타르타가 16세에 결혼했으니 14년 만에 얻은 아들이다. 이제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아들이 태어났으니 오랫동안 품어왔던 출가를 미룰 이유가 없다. ‘라훌라!’라는 싯타르타의 외마디 탄식을 아들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남아있는 이들의 선택이었다. 아기의 이름을 ‘라훌라로 지어라’라고 부탁하고 떠난 것이 아니기에 어떻게 자기 자식에게 ‘장애’란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느냐는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싯타르타는 이렇게 출가이유를 밝히고 있다.

 “비구들이여, 내가 깨달음을 이루기전 보살이었을 때, 나는 스스로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 그리고 슬픔과 번뇌에 묶여 있으니 그것들의 재난을 알고 안온한 열반을 구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M26) 

그는 왕궁의 동쪽 문으로 나가 하룻밤사이에 아노마(Anomā)강을 건너 아누삐야(Anupiya)에 도착하였다. 밤새도록 달린 거리는 6요자나(Yojana)인데 이 거리는 현재 까삘라왓투에서 간다끄(Gandak)강까지의 거리이다. 싯타르타는 이 강을 건너고 나서야 안심(安心)하고 머리와 수염을 자르고 수행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밤새 동행해준 마부찬나(Channa)와 애마 깐따까(Kantaka)를 왕궁으로 돌려보내며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아누삐야 머무르면서 박가와라는 고행자를 만나고 일주일 뒤에 웨살리로 떠났는데 흥미롭게도 지금 간다끄강옆에 바가하(Bagaha)라는 지명(地名)이 남아있다. 싯타르타는 보리수에서 깨달음을 얻고 까삘라왓투로 가는 길에 다시 이곳 아누삐야의 박가와를 찾아와 이야기(D24)를 나눈다. 그의 첫 번째 스승인 알라라깔라마는 웨살리에 다다르기 50km전에 깔라마인들이 사는 께사뿟따 출신이었을 것이다. 께사뿟따에서는 유명한 깔라마경이 설해졌고 부처님이 건네준 발우를 봉안했던 께사리야탑이 세워진다. 알라라깔라마의 가르침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다시 라자가하로 내려온 그는 웃따까라마뿟따에게 최고의 선정을 배운다. 거기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던 그가 마지막에 도달한 곳은 우루웰라 네란자라강 근처였다.

라우리야아레라즈(Lauriya-Areraj) 석주

싯타르타가 왕궁의 동문에서 출발하여 밤사이에 아노마강을 건너고 다시 웨살리와 라자가하로 내려온 것을 보면 처음부터 그의 목적이 분명해 보인다. 그가 웨살리와 라자가하로 남하한 것은 분명 당신이 만나볼 만한 수행자들이 그곳에 있다는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북문으로 나가서 만년설이 쌓인 히말라야 설산(雪山) 동굴로 가지 않고 동문으로 나와서 그 당시 가장 번화한 도시로 남하한 이유이다.

흔히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팔상도(八相圖)에서는 부처님의 수행을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마치 싯타르타가 히말라야 설산에서 6년 수행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부처님은 설산으로 가지 않고 아노마강을 건너 곧장 남하(南下)하였다. 그렇다면 왜 싯타르타가 설산수도 했다는 오해가 생겨났을까? 싯타르타가 빔비사라왕에게 “저쪽에 히말라야가 보이는(himavantassa passato) 한 나라가 있습니다. 꼬쌀라국의 주민으로 재력과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고향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한때 세존께서 꼬쌀라국의 히말라야가 보이는(himavanta passe) 숲속 꾸티에 머무셨다.”라고 설명하듯이 ‘히말라야가 보이는’이라는 설명은 자주 등장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히말라야는 워낙 거대하고 유명하기에 곧 잘 히말라야를 언급하여 장소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히말라야가 랜드마크(landmark) 역할을 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충청도의 수덕사를 외부에 소개할 때 ‘예산 수덕사’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막상 예산터미널에 내려서 수덕사를 찾아보면 수덕사는 없다. 수덕사는 예산에서 멀리 떨어진 덕산면 사천리에 있는데 정확하게 설명한답시고 ‘사천리 수덕사’라고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된다. 이처럼 설산수도상은 ‘설산이 보이는 어딘가에서 수도했다’는 말이지 설산으로 들어가서 눈 쌓인 동굴에서 수행했다는 말이 아니다. 싯타르타가 수행했던 지역이나 45년 동안 전도했던 지역은 대체로 설산이 보이는 지역이었다. 지금 니까야를 번역하는 사람들도 ‘히말라야가 보이는’으로 번역하지 않고 “히말라야 기슭 혹은 히말라야 중턱”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러한 번역들은 싯타르타가 설산에서 수도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그러나 싯타르타의 출가행로를 확인하면 싯타르타는 산이 아니라 도시로 출가했으며 스승을 찾아서 출가했음을 알 수 있다. 싯타르타가 출가할 때도 그리고 붓다가 되어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도 아노마강과 아누삐야를 지나간 것을 보면 당시에 이 길은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길이였을 것이다.

싯타르타의 출가행로를 확인하면 싯타르타는 산이 아니라 도시로 출가했으며 스승을 찾아서 출가했음을 알 수 있다.

웨살리와 라자가하는 그 당시 가장 번성한 도시들이었고 수행자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싯타르타는 그 많은 수행자들 중에는 자신이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싯타르타가 남하(南下)한 출가행로를 확인하고 다시 화엄경의 입법계품을 상기한다면 선재동자의 구법여행이 싯타르타의 구법여행과 상당히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승의 사상가들은 싯타르타의 출가행로를 확인하고 출가라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선재동자를 등장시켜 재현해내고 있다. 싯타르타의 출가행로를 추척해본 결과 그의 출가행로는 스승을 찾는 여정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사람가운데서 스승을 찾았고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셨다. 수행자들이 머무는 승원도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도 안 되고 마을 속에 있어도 안 된다는 기준을 제시하셨는데 실제로 죽림정사와 기원정사는 마을과 1~3km 사이에 세워졌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입산출가라는 말도 단순히 산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산속사찰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를 만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부처님이라는 스승과 그 가르침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먼저 부처님 제자가 된 어른 혹은 선배수행자들에게 교리와 수행방법을 배우기 위해 출가하고 있는 것이다.

싯타르타가 출가한 노선을 따라 아소까석주 2개가 세워져 있다. 북쪽에 있는 것이 라우리야난당가르(Lauriya-Nandangarh)석주이고 이곳에서 남쪽으로 55km지점에 라우리야아레라즈(Lauriya-Areraj)석주가 있다. 라우리야 난당가르 석주 가까운 곳에 거대한 스투파가 있는데 부처님의 재(ash)를 모신 스투파라고 한다.

열반경에 의하면 삡빨리에사는 모리야족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가고자 왔으나 이미 사리분배가 끝난 뒤여서 그들은 숯을 가져다가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석주들은 강을 따라 거의 일렬로 세워져 있는데 라자가하에서 사왓티로 가는 무역로였기에 석주를 세웠을 것이라는 일부학자들의 의견이 있으나 내 생각에는 그 석주의 일부는 싯타르타의 출가행로를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이유는 아소카왕의 대단한 신심 때문이다. 부처님이 올라간 전정각산 정상 곳곳, 우유죽을 받은 곳, 목욕하신 곳, 빔비사라왕을 만난 곳, 자타까에 나타난 주인공들이 살았던 곳, 과거 부처님들이 태어난 곳, 부처님 제자들이 태어난 곳, 그들이 수행한 곳 등 아소까는 부처님과 관련된 모든 곳에 탑을 세우는 정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히 팔만사천탑을 세웠다는 것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 아소카왕이라면 당연히 부처님의 출가행로를 따라 기념물을 세웠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라우리야난당가르(Lauriya-Nandangarh) 석주

싯타르타가 스승을 찾아 떠났다면 그가 스승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우루웰라로 오기까지 만난 최소 세 명이 넘는 스승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났지만 구체적으로는 일곱결발 고행자경(S:11)에서 엿볼 수 있다. 부처님은 누구 믿을만한 스승인지 당황해하는 빠세나디왕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그들이 ‘계행’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청정’한가 하는 것은 같이 대화를 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대화를 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평정심’이 있는가 하는 것은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재난을 만났을 때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지혜’가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논의함으로써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싯타르타는 스승을 찾아 떠났고 스승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4가지 기준으로 스승을 점검하여 판단했다. 스승에 대한 은혜를 입었어도 스승의 가르침에서 부족함을 느끼면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체 없이 그 곳을 떠났다.

싯타르타가 걸어간 출가의 길을 더듬어보며 오늘날 현실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스승을 찾아서 구법여행을 떠난 것인지, 스승 같은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4가지로 점검해보았는지, 그래서 스승이 아니다 싶으면 주저 없이 떠나왔는지를 되묻게 되는 것이다. 출가정신을 잊어버리고 돈과 명예를 다 갖추고 있으면서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을 스승이라고 지도자라고 모시고 있지는 않은지, 오히려 그들의 그늘에 기생하면서 무사안일에 빠져 나만의 이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허정스님 budgat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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